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빨간펜은 싫으시다고요?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1. 7. 18. 11:50
    728x90
    반응형

    주변에서 글깨나 쓴다는 말을 듣곤 했지만, 나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세상에는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인간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대표적인 레드 오션). 내가 글을 더욱 잘 쓰고 싶을수록 좌절감이 느껴져서, 그냥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인간을 다 조용히 죽이고 싶을 때도 많다(농담). 이렇게 부족한 내게 누가 글쓰기 특강을 요청해 왔다. 엥? 가르치라고요?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그 제안을 수용했다. 왜? 내 자신이 글을 잘 쓰는 모습을 보는 일보다는, 학생들이 더 잘 쓰게 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좀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기간은 딱 3회기를 주신단다. 시간은 첫 회기가 2시간에 나머지 회기는 각각 1시간 30분을 주시겠단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카카오 단체 톡방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드린 후, 직접 학생들을 만나서 분위를 파악해 보았더니, 어머나... 학생 분들께서 다들 기대가 크다고 말씀하신다. '아뿔싸... 거절할 걸. 3회기, 총 5시간 만에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나?' 제한 시간 내에 풀기 어려운 문제를 받았는데,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지구인이 몰살되기 때문에 온 지구인이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으며, 그래서 모두 나를 응원한다고 말하는 듯, 몹시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웠다. 

     

    결국, '어떻게 가르칠까?'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온갖 고민을 하다가 제한 시간 내에 학습 효율을 제일 높게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임팩 있는 요점 강의와 빨간펜. 먼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 품고 있는 기준 세 가지를 소개했다. 그리고 일정한 글쓰기 과제를 내 준 후에,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1:1 개별 지도로 첨삭해 드렸다. 그러니까 총 3회에 걸쳐서 학생들에게 글을 쓰라고 요청했고 3회에 걸쳐서 개별 지도를 해 드린 셈이다. 다 큰 성인이 써 놓은 글을 평가하고 첨삭을 한다는 게, 나로서도 내키지는 않았다. 더구나 나도 글을 잘 못 써서 헤매고 있는데 남이 써 놓은 글을 어찌 평가하고 첨삭까지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빨간펜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학생들은 내가 품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생 실력을 높이려는 열망에 놀라고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로써 말을 하면(자신이 쓴 글을 손에 쥐게 되면) 인정을 해 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학생들이 제출한 글에 내가 떠올린 생각을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전달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했었다'나 '그랬었다'와 같은 표현을 쓰느냐 안쓰느냐로 어떤 사람이 무식하냐 유식하냐를 가른다고 서슴없이 말했고, 관형격 조사 '의'를 직접적인 소유격 용법 외에는 제발 쓰지 말라고, 이는 일본말에 너무나도 오염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게 뜨겁게(?) 가르치고 배웠던 3주가 지났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엔 학생 제위께서 정성스럽게 써 내신 훌륭한 글이 올라와 있다. 각자 부끄럽게 꺼내 놓은 진심이 가득 담긴 글을, 어줍잖게 선생이라고 앞에 나선 내가 냉정하게 난도질(!)했는데도, 다행히 학생들께선 도망가지 않으셨다. 많이 죄송하고,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럽다. 함께 눈 딱 감고 가르치고 써서 이 정도로 '있어 보이는' 글을 낳았다는 게 무척 기쁘다. 이젠 제발... 이 듣보잡 선생이 난도질 하며 했던 말은 잊어주시길 바라면서, 내가 키운 학생들께서 쓰신 재미나고 의미 있는 글을 자랑스럽게 세상에 보이려고 한다. (아래 보이는 파란 글씨가 글 제목이고, 그 아래에 '더 보기'라고 쓰인 글자를 누르면 글 본문이 보인다.)

     


     

    제발… ‘했었다’ 라고 쓰지 마세요!

    연대북스와 함께 하는 글쓰기 특강! 존경하는 선배 사회사업가이자 내 박사과정 동기이신 정현경 선생님과 훌륭한 사회사업가 동료들께서 함께 모여 공부하는 모임, 연대북스. 다양한 세팅에서

    empowering.tistory.com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일곱 살

    연대북스와 함께 하는 글쓰기 특강! 첫 번째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 주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간에 관해 쓰시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혹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

    empowering.tistory.com

     

    쓸 데 없는 말을 하라고

    <산부인과 양석형 교수 연구실> 채송화(신경외과 교수): 너는 일단, 말을 많이 해. 양석형(산부인과 교수): 나, 할 말은 다 해. 필요한 말은 다 하는데? 채송화: 쓸 데 없는 말을 해야지. 할 말만 하

    empowering.tistory.com


     

    그놈이 내게 준 교훈 (박은하)

    더보기

    4년 동안 만났는데 2년 간 곰신으로 지냈다. 하필 그놈은 서울에서 군 복무를 했기에 면회를 가지 않을 중차대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항상 부대 안에서 주말 시간을 보냈다.

     

    무슨 겉멋인지 모르겠지만 그놈은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며 결별을 선언하고 입대했다. 그놈이 입대하던 날 나는 친구들에게 그놈이 입대하며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해서 들었고, 이후 며칠 밤 동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놈이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군사우편 한 통이 날아 왔다. 결별을 선언하고 혼자 쿨내 풀풀 풍기며 떠날 땐 언제고! 자신이 어리석었다며 미안하다고 다시 만날 수 있냐고 읍소했다. 지금 같으면 콧방귀를 뀌겠지만 그 어이없는 편지에 나는 뛸 듯이 기뻤고 온 세상이 사랑이었다.

     

    나는 꽃다운 20대 초반 주말 시간을 냄새나는 부대 안 면회실에 자진 반납했다. 면회실은 부대 내 제한된 공간이지만 공간별로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가족실, 연인실, 화합실(?). 연인실은 인기가 많았기에 부모님과 함께 면회 가지 않는 날이면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아침잠을 포기하고 일찍 서둘러야 했다. 언젠가 한번은 면회 날 보초 당번이 걸려 오전 면회 후 그놈은 보초 서는 담벼락에서 만나자고 나를 꼬셨다. 머리 속에서 ‘그래도 되는 거야?’ 라며 물음표를 한참이나 그렸지만 결국 그 놈은 부대 안에서 보초를 섰고 나는 그 너머 담벼락 아래 서 있었다. 하~ 내가 미치긴 단단히 미쳐 있었나보다.

     

    온 세상이 사랑이었던 그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주말을 면회에 반납한 보람도 없이, 제대한 그놈은 대학후배와 바람을 피웠고 우리는 헤어졌다. 최근 시작한 드라마 여주공 나레이션에서 ‘사랑,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대사를 들으니 영원할 것 같았던 그 당시 사랑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일이 생각나서 끄적거려 본다. 그리고 ‘지금 사랑이 후에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린다고 해도 사랑을 멈추지는 말아야지! 세상에 내가 사랑할 대상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 놓아야지, 라고 다짐한다.

     

     

    카시오페이아 (구선아)

    더보기

     카시오페이아는 밤하늘에 국자모양 북두칠성 옆에서 W(더블유)모양으로 빛나는 다섯 개의 별이다.

     

    고등학교를 각자 다른 지역 학교로 진학하는 친구 다섯 명은, 중학교 때 쌓은 추억을 진하게 남기고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좋은 친구’ 결의를 다지기로 했다. 가을밤 하늘에 가장 빛나는 카시오페이아처럼 평생 멋진 친구가 되기로 했다. 북두칠성 반대편에서 빛나는 다섯 개의 별, 길라잡이 별이라고 하는데, 누구나 아는 가장 빛나는 사람보다는, 없어서는 안 될 멋진 사람들이 되자고 말하면서 빛나는 별이 되기로 다짐했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건전한 조직을 만들자고 수다를 시작한 우리는 동아리 이름을 정하고 향후 일정까지 정했다. 그리고 기념이 될 만한 징표도 만들자고 하여, 겨울에 자주 쓰던 마스크 좌측에 빨간별을 새기기로 했다. 교복집에 부탁해서 빨간별 마스크 다섯 개를 제작하고 우리의 뜨거운 사춘기를 기념했다.

     

    헌데, 한 달 정도 후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다섯 명의 개인물품 모두 교무실에서 가방뒤짐을 당했다. 3학년 학생들과 담임선생님까지 대소동이 났다. 1980년대 중고등학교 학생동아리 일제점검에 인근 학교 일진이 걸렸다. 소지품 검사 중 친구 가방에서 빨간별 마스크가 나왔다. 이건 무엇인가를 묻는 선생님 질문에 친구는 카시오페이아 동아리를 소개했다. 우리 학교에 일진 그룹이 있다고 교무실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그날 이후 다섯 명에게는 졸업식 전까지 각 반 담임과 부모님의 각서와 집중관리로 5인 집합금지, 접근금지령이 내려졌다. 교칙대로 처리하면 고교 진학에 큰 장애가 생길 수 있어서 학교에서 취할 수 있는 제일 적절한 처분이 내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던가? 언제 어디서나 빛나기로 약속한 카시오페이아다. 하교 후 부모님의 집중단속을 피해서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단골 떡볶집으로 모였다.


    “야. 니 그거 와 들고댕기고 지랄이고!” 친구가 성질을 내면서 물었다.
    “아...거 있는거또 몰라따야” 언제나 정직하고 착한 친구의 대답이다.
    “그라고 머시 일진이라꼬 니는 말도 못하나! 미친나! 쪽팔리가꼬 내가 으이구...” 하필이면 이 친구가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재택근무라서 집에 있는데 딸이 에디 캐릭터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문득, 빨간별 마스크가 생각이 난다. 2021년 코로나로 마스크를 쓴 생활이 익숙해지고 있는데 빨간 마스크를 쓴 카시오페이아 친구들이 떠올라서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얘들아, 나는 기억할 거란다 (최계명)

    더보기

    34년간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어떤 순간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수많은 순간이 떠오르지만, 나는 지금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번 달부터 1년 동안 육아휴직을 신청하여 삼 남매와 원 없이 놀고 있다. 아이들 유치원도 안 보내고 있다. 예전에는 '월월월월월토일'이었으나, 요즘 일주일은 '토토토토토토일'이다. 아이들은 눈을 뜨면서부터 감을 때까지 외친다: “아빠! 놀자!”

     

    그런데 누가 그런다: "아이들 지금 한참 놀아줘도 기억 못 해." 하지만 그 사람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게 확실하다. 아이들은 기억 못 해도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인 내가 기억한다. 직장 생활 할 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려 11시간을 밖에서 보냈다(일 8시간, 출퇴근 왕복 2시간, 점심 1시간). 그리고 보통 6-7시간 잔다고 생각하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2-3 시간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내가 출근하고 나서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이 육체적으론 힘들지만(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보통 일은 아님) 마음으로는 아주 많이 행복하다. 매일 11시간 동안 아이들과 지내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그런다: "아이들 놀아줄 때 양보다는 질이다." 하지만 나는 ‘질은 양을 따라올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놀다가 지쳐서 기진맥진해질 때도 있지만) 아이들과 많은 시간 나뒹굴며 논다. 나는 지금 이 순간도 키즈 카페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 볼 풀장에서 열심히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보며 웃어줄 때마다 나도 손을 흔들면서 계속 웃어준다. 지금 행복한 순간을 생각한다는 게 역설이다. 왜냐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우리집 국보 제 1호 (엄선영)

    더보기

    나는 5살 연상 남편과 살고 있다.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와 헤어지고 방황할 때. 조금은 특이한 남자가 다가왔다. 소주에 돈가스, 맥주에 알탕을 즐기고, 술 마시고 난 후 달콤한 (아이스크림) 체리쥬빌레로만으로 입가심을 하는 아주 특이한 남자였다. 데이트는 나에게 물어보기보다 스스로 계획했다. 새벽 6시에 만나 파주 통일전망대에 가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고, 한강에 가서 분위기를 즐기기보다 한강이 서울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토론했다. 내가 여름에는 인라인, 겨울에는 스키를 즐기는 동안 그는 언제나 고요하게 책을 읽었다. 연락은 주로 전화통화로만 하고, 문자는 “응”, “아니”, “좋아”,“싫어” 등 3음절을 넘어가지 않았다.

     

    문자 시대가 가고 카카오톡 시대가 오면서 통화보다는 인스턴트 메시지를 더 많이 사용했다. 물론 남편도 전화통화를 주로 하다가 카톡을 많이 사용했지만, 여전히 단답형이였다. 한 번은 보고싶다,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연속 세 번 카톡 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 연락이 왔다: “그렇게 길게 보낼 거면 그냥 전화해!” 그는 화를 냈다. 어이가 없었지만 바쁘니까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카톡을 사용하면서 나는 줄임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복지관에서 청소년을 담당이라 나이에 비해 줄임말 표현을 자주 했다. 하루는 일이 너무 바빠서 톡을 볼 시간조차 없었는데 급한 일인지 평소에는 3음절 이상 카톡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남편이 카톡 메시지를 연속해서 보냈다. 일단 알고만 있으면 될 내용이였기에 “oo” 라고 보냈다. 그러자 남편은 갑자기 화내는 이모콘티를 보내며 이런 메시지를 보내 왔다: “어디서 눈을 부라려!” 이 말에 웃음이 터졌고 주변에 있던 동료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날 이후 남편은 우리 복지관 인기스타가 되었다.

     

    이 남편과 만19년째 살고 있다.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남편이지만, 나를 잘 알고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년에 20주년이 되면 선물로 줄임말 사전을 만들어 주고싶다.

     

     

    음주가무로 만끽한 해방감과 자유 (어명희)

    더보기

    내 흥은 음주가무에서 나온다. 나는 본래 밝고 활달하지만 유독 음주가무를 즐길 때 흥이 폭발하고 행복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하지 말라는 건 다 하던 날라리 언니와 학교 일진들과 어울리던 양아치 동생 사이에서 어쩌면 위태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례로 당시 중학생이던 언니는 엄마, 아빠가 없는 날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술을 마셨다. 나는 같은 방 책상에 앉아 책 읽는 척 했지만 불안한 마음에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곤 했다. 남동생은 패싸움에 휘말려 종종 파출소에 출입했고 그 때마다 언니가 보호자 신분으로 해결했다. 이런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나는 '나라도 저러지 말아야지' 수없이 되뇌이며 '착한 딸'이 되기로 결심하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정 내 평화를 담당하던 나에게 언니가 악마처럼 유혹하는 손길을 보냈다. 성인이 된 나에게 언니가 건넨 술 한 잔을 마시고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술을 마실 때 생기는 신체 변화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해방감을 느꼈다. “야! 어명희! 그만 착한 척 해! 술 마시는게 죄는 아니잖아!” ‘나는 그러면 안되지’ 라고 말하면서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지내던 또 다른 내가 과감하게 탈출한 짜릿한 느낌이랄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언니는 나를 나이트 클럽으로 초대했다. 무대 앞 스피커가 바로 내 자리였다. 바운스가 내 심장을 관통할 때면 모든 걱정이 튕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이었다. 무장해제 된 나는 해방감 그 이상 자유를 느꼈다. (단,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나는 사람들과 술한잔 나누며 수다를 떨고 스피커 앞에서 춤추며 에너지를 발산하기를 즐길 뿐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언니는 유혹의 손길을 보낸 악마가 아니라 해방감과 자유를 선물한 천사였다. (내가 어린 시절에 만든)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한다는 정체성 때문에, ‘사회복지사인 내가 음주가무를 즐겨도 되나’ 싶은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런데 뭐? 나 어명희야~! 이렇게 노는 게 어때서?’ 음주가무에 진심이고 음주가무로 행복한 나는 이미 다음 타겟을 결정했다: 싸. 이. 콘. 서. 트! 광끼 어린 싸이와 함께 화려한 무대, 조명, 음향 속에서 미친 듯이 뛰고 소리 지르며 밤새 하얗게 불태우고 싶다. 나는 미칠 준비가 되어 있다. 훗. 그러니 코로나야, 제발 꺼져줄래?

     

     

    나는 또라이입니다 (권현기)

    더보기

    나는 나를 또라이라 부른다. 내성적인 성격이면서 상대에게 싫은 말을 잘 못하는 편이지만, 내 기준에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작은 몸에서 불덩이가 발생한다. 분노가 과하게 표현되어 헐크가 된다. 그러다 보니 때론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또라이 기질이 발동하면 주변에 알린다. ‘나 (분노/또라이) 게이지 올라가고 있어. 곧 들이 받을 거니까 말리지마’라고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추억이다. 친구와 나는 라이벌 학교 학생들과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그 속에는 쓸데없는 신경전도 있었다. 그날도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데 내 친구가 갑자기 ‘아’하고 말했다. 내가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걷다 친구가 말했다: ‘나 밟혔어.’ 발을 밟혔는데 사과도 받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단다. ‘왜 말 안했어?’라고 이야기 하자 ‘너 또 변할까봐’라고 했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또 또라이가 되어 누가 내 친구 발 밟았냐며 소리 지를게 뻔해서 였으니 그래서 친구가 말 하지 못한 거다.

     

    성인이 되어서도 또라이 기질이 남아 있다. 가끔 이용인(현재 근무하고 있는 기관의 장애인)과 개인 외출을 나가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용인을 민망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있다. 대부분 어린 아이다. 그러면 나도 그 아이 앞에 가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 그 아이는 ‘뭐야 이 아줌마’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너도 쳐다 보니까 싫으니? 우리도 그래, 같은 사람인데 왜 그렇게 쳐다 볼까, 그건 예의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상한 아줌마네’ 라고 말한다). 그러든 말든 나는 끝까지 그 아이를 쳐다 본다. 그러면 그 아이는 간다. 나는 이상한 아줌마라서 아이와 싸운다. 남들이 보면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말하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라서 더 바르게 배워야 한다.

     

    기억해 보면 내가 또라이가 되는 순간이 유치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때로는 화가 나는 상황도 있지만 그래도 난 또라이가 되는 순간 튀어 나오는 내 모습도 소중하다.

     

     

    돌격, 집으로! (한보리)

    더보기

    몇 주 전 남편과 대판 싸웠다. 마트 가는 길에 싸운 후 아무 것도 안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자주 싸우진 않지만 한번 싸우면 화해도 잘 안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잠옷만 챙겨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가는 길에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그를 차단했다. 그제야 부글대던 열이 조금 식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웬일로 스위트룸으로 배정을 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남편에게 카톡을 보낼 뻔했다. 야, 나 지금 호텔 룸 업그레이드 받았어. 대박.

     

    남편과 싸우면 집에 있기가 싫고, 그러다보면 회사도 그만두고 싶고, 그러다 보면 무작정 떠나고 싶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 마을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일을 구할 것이다. 일머리가 좋아서 금방 종업원에서 식당 관리자로 승진할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허름한 여관에서 묵어야 하겠지만, 남편이 전국을 다 뒤져서 나를 찾아낼 때까지 그곳에서 지낼 것이다. 그때까진 쇼핑도, 영화도, 브런치 카페도 단념한 채 살아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떠돌이처럼 살았다. 아무 집이나 따뜻해 보이면 들어가고 싶었다. 실제로 어둑한 시골길을 지나가다 불켜진 집이 보이면 그 집에 들어가서 살고 싶었다. 그러면 그냥 그 집 식구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을 만난 후에야 이런 기이한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게도 남부럽지 않은 집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남편과 싸울 때마다 철거민이 느낄 법한 분노를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용돈으로 호텔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남편은 빨래와 설거지, 분리수거까지, 집을 말끔히 정리해 두었다. 나는 이미 화가 풀렸지만 다음 날 남편이 먼저 화해를 청할 때까지 기다려 줬다. 이제 나는 시골에서 촌뜨기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자려고 누우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험난한 모험 끝에 집으로 돌아온 말썽꾸러기처럼 코를 골며 잠을 잤다. 달콤한 잠이었다. 집이다. 이제 진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 (이민지)

    더보기

    “무슨 말인지도 하나도 모르겠는데예. 거가 노무현재단 맞나예?”

    당황함에 여러 번 같은 설명하던 내게, 회원님은 한마디를 더하고 전화를 끊으셨다.

    “뭐라카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뭔말이고.”

     

    새로운 기운이 가득했던 올해 3월, 나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모금 담당자로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위 대화는 재단에서 모금 담당자로 첫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날 후원자와 나눈 이야기이다. 나름의 경험과 노하우를 집약했다고 자부한 첫 프로젝트,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테스트 전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프로젝트 주제는 내년 봄 개관하는 시민센터 내 [대통령의 서가 조성]이었고, 나는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떠올리며 이 공간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장황하게 써 내려갔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위 대화처럼 말이다. 주로 기업에 사회공헌 활동을 제안하고 배분하던 옛 현장과 달리, 개인 후원자와 대중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현장은 낯설고 어색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하기를 여러 날, 후원자와 나눈 대화 속에서 답을 찾았다. 유독 울먹거리던 후원자와 대화하던 중, 무슨 바람에선가 나도 그 분이 그립다고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하모요”라며 공감을 해주셨다. 처음으로 후원자와과 공감했던 그 날,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충분한 정서적 공감이 필요했다. 울먹이며 전화를 걸었던 후원자에게는 UN SDGs와 세계의 불평등과 같은 거시적인 당위성보다는 함께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우리의 프로젝트는 순항 중이다. 스크립트와 메시지를 전면 재검토하는 수고스러움은 있었지만, 1억 5천만원 목표였던 프로젝트는 7월 중순 현재 4억 가까이 모금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감과 소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요즘이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jaewonrhie@gmail.com)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