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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잊을 수 없는 8월 14일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2. 8. 14. 09:19728x90반응형
2014년 8월 14일,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850km를 완주하고 난 후, 마지막 100km를 함께 걸었던 후앙코 모야, 라는 스페인 친구가 나를 마드리드로 초대했다. 보통 순례길을 완주한 사람은 '세상 끝'이라는 '피니스테라(Finisterre)'로 걸음을 청하지만, 나는 약 3일 정도 남은 시간을 후앙코에게 투자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순례길은 물리적인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물리적인 산티아고 순례길, 별 것 없다. 길도 후지고, 숙소도 후지며, 걷는 내내 지루하고 아름답지 않다. 중간에 고원 지대가 있는데, 그 지역에 걷노라면 약 20km 정도 문자 그대로 순례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황량하고 지루하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이 길이 뭐가 좋다는 거지? 하지만 곧 깨달았다. 순례길이란 곧 사람이고, 각자 걷고 있는 사람들을 이으면 순례길이 된다는 사실을.
내 SNS 계정 배경 화면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진이다. (왼쪽이 루씨 아줌마, 그리고 오른쪽은 마크-안드레. 루씨 아줌마는 스위스 자택에서부터 2,500km를 걸어 오신 분이고, 마크-안드레는 빠리에서부터 1,500km를 걸어 왔다.) 이 두 사람를 포함해서 무수히 많은 좋은 친구를 순례길 위에서 만났다. 이 경험을 질문 하나로 요약해 보겠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 작은 손짓 하나에도 반응하면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속에서 여행해 본 적이 있는가?"
후앙코도 마찬가지였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마치 한국 사람처럼, 다정했다. 20,000km 밖에서 스며든 이방인인 나를 집에 들이고, 3일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 주었다. 아직도 나는 후앙코와 함께 한 마지막 식사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들 피니스테라에 가지만, 나는 길을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했어. 나에겐 사람들이 길이야.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준 네가 나의 피니스테라야."
마지막 종착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순간, 위 사진을 찍어준 사람도 후앙코였다. 대성당에 도착하면 갈리시안 맥주를 머리에 붓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고, 대성당 앞에서 실제로 맥주를 머리에 부었다. 덕분에 그날 하루 종일 몸에서 맥주 냄새가 났지만 난 참 행복했다. 마음에 매달린 짐을 질질 끌면서 850km를 걸어온 느낌이었는데, 마침내 짐을 내려 놓고 축하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맥주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방문했던 순례자 사무실. 이곳에서 순례길 완주 인증서를 받았다. 함께 걸은 루씨 아줌마, 마크-안드레, 후앙코와 함께 방문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눈물이 터졌다. 성취감이나 허무감이 들어서는 아니었고, 너무나도 고마워서 울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사연을 가지고 이 길에 모여 함께 걸었는데, 이들은 시종일관 나에게 친절했고 정중했으며 인간적이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산티아고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똑딱이로 그냥 대충 찍었는데, 사진이 기가 막히 게 잘 나왔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힘들었다. 너무나 외로웠고,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끝내 삶을 포기하진 않았다. 너무나도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 속으로 내 망막에 비쳤던 산티아고 대성당을 떠올렸다. 아니, 내가 걸었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산티아고 대성당이고 순례길이었으니까.
스페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드리드 부엔 레띠노 공원 모습. 반려견과 함께 풀밭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오후 햇빛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부럽다. 서울에 돌아와서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바로 여기서는 언제나 뛰어야 한다는 사실.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먼저 타 보겠다고 뛰는 사람들 틈 속에서 나는 웃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순례길 850km를 '완주'하고 '정복'하는 '과업'이 아니라, 바로 저 사람의 '여유'다.
2014년은 내 인생에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해다. 끔찍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던 시기. 하지만 이 사진을 보면 언제든 다시 돌아가고 싶다. 저 날, 후앙코는 자기가 평소에 아이들에게 아웃도어 스포츠를 안내하고 가르치는 숲으로 나를 안내했다. 숲에 있는 나무를 안아 보고, 나무와 도란도란 대화까지 나누는 그를 보면서 순간적으로나마 내 마음이 평화로웠던 기억이 난다. 쓰레빠 찍찍 끌면서 그와 다시 그 숲에 가고 싶다. 그리고,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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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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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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